그리운 들불
-황광우
지금은 남한의 <인터내셔널가>가 되어 있는 <님을 위한 행진곡>에서부터 80년 5월 광주에 관한 이야기의 실마리를 끄집어내고 싶다. 이 노랫말의 작사자가 백기완 선생이고, 이 노랫말의 주인공이 윤상원 열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새내기들은 많지 않으리라. 더더욱 이 노래가 윤상원 열사의 <영혼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윤상원 열사와 영혼 혼례를 올린 신부의 이름이 박기순 누이임을 알고 있는 이는 아주 희귀하리라.
내가 박기순 누이를 처음 만난 것은 1978년 1월 그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서울의 신림동에서도 비지구의 빈민촌에서 공장 노동자들과 함께 야학을 하고 있었고, 가끔씩 인천의 동일방직 공장 앞에서 노동자 누이들과 술을 마시면서 노동운동의 이야기들을 배워나가던 터, 광주에서 올라온 한 여성을 서울 신림동 빈민촌의 자취방에서 만나게 되었다. 참 걸걸한 목소리를 내는 소박한 품성의 여성이었다.
내가 박기순 누이를 두번째 만난 것은 1978년 9월 그 어느 날, 광주의 양림동 어느 자취방에서였다. 이미 그녀는 전남대학교에서 사고(?)를 치고 도발이를 치는 중이었고, 경찰의 수배망을 피해가면서, 야학을 만들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함께 밥을 해먹으면서, 노동자들에게 줄 한자 교재도 만들고 사회 교재도 만들면서 무더운 여름 밤을 보냈었다. 우리들 앞에는 타도해야 할 박정희 독재 정권이 있었고, 우리들이 가고자 하는 길은, <민중 속으로>였다. 당시의 시대 정신은, 독재 정권을 타도할 힘을 민중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 우리는 이 대의를 위해 무척 진지하게 고민하였고 실천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어 나갔다.
내가 박기순 누이를 세번째 만난 것은 살아 있는, 그 아름다운 여성이 아닌, 이미 무덤에 누워있는 저 세상의 여인이었다. 김해 교도소의 0.9평 독방에서 난 이 어이없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어이, 광운가? 기순이가 죽어부렀어. 크리스마스날 야학 잔치 벌이고 집에 갔는데, 연탄가스로 가부렀다네." 광주에서 김해로 이감온 한 동지가 식구통을 통해 들려주는 이 소식을 들으면서, 내 가슴 속엔 아쉬움과 안타까움만이 맴돌았을 뿐, 이후 이어질 죽음의 행진을 전혀 예감할 수 없었다.
1979년 7월 17일 제헌절 특사로 1년여의 잔여 형기를 남기고 김해교도소를 나온 나는, 맨 먼저 기순이의 묘를 향했다. 지금은 국립 묘지 뺨칠 정도로 잘 치장된 망월동이지만, 당시 우리가 갔던 망월동은 말 그대로 달을 보는 공동 묘지였고, 지금은 아스팔트 도로가 쉬원하게 뚫려 있는 망월동이지만, 당시 우리가 걸었던 망월동으로 가는 길은,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 나오는, 가르마같은 들길이었다.
묘비에는 <노동자의 누나 박기순>이라고 씌여 있었다. 우리는 가지고 간 소주 대두병을 나발 불기 시작하였다. "일배 일배 부일배 허면 너와 내가 하나고 되고, 일배 일배 부일배 허면 나와 산천이 하나 된다."고 제법 어린 시절 익힌 한문 솜씨를 자랑하며, 이태백 풍의 호기를 자랑하던 박관현, 그는, 이후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광주 항쟁에서 주역으로 활동하다가, 1982년 광주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던 중 장기간의 단식으로 죽어갔다. "시를 쓰려면 요렇게 쓰겄다. 저기 저 놈 보아라, 국회의원 나온다."하며 김지하의 오적을 그렇게도 실감나게 불러제낀 이는, 80년 5월 26일 새벽 4시 광주 도청을 사수하다 배에 총알을 맞고, "오매, 형님, 배에 맞아부렀소" 외마디 남기고 죽어간, 우리의 영웅, 윤상원이었다. 기순이, 관현이, 상원이는 모두 광천동 빈민촌에서 노동자와 더불어 야학을 운영하던 멤버들. 지금도 이들과 함께 막걸리 놓고 민요 타령하던 자취방공동체의 숨냄새가 그리워진다.
박기순 누이가 죽음으로 만들어 놓고간 들불 야학은, 노동자들과 함께 배우고 가르치고,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면서 79년의 가을을 태평하게 보내고 있었다. 윤상원, 박관현이 학생 출신 운동가였다면, 스스로 빈민이면서 빈민운동을 하고자 들불 야학을 도와주었던 김영철, 김용진이 있었다. 김용진은 고아 출신. 어쩌다 포장마차에서 술이라도 한 잔 걸치고 나면, 금남로가 떠나가도록, 무슨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을 꽥꽥 질렀던 것이 기억난다. 이후 항쟁의 한 가운데 YWCA 건물을 지키다, 공수부대의 기총 사격을 받고, 현장에서 즉사한 것으로 용진 형의 최후 소식을 들었다. 머리카락 한 올을 벽에 남긴 채.
이 김용진을 이끌어준 선배가 김영철씨였던 것으로 안다. 김영철 선배는 항쟁이 끝나고 상무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이후 광주교도소에서 먼저 간 윤상원을 부르며 자신의 머리를 벽에 찧는 자해를 하면서 스스로 정신병자가 되어버렸다. 17년간을 정신병동에서 사투하다 97년도에 동지들 곁에 갔다.
광주는 양심있는 자들에게 "너 그 때 어디에 있었느냐?"는 실존적 자학을 자아냈다. 그러한 가장 엄혹한 자학의 시련을 감당해야 했던 이들은, 윤상원과 함께 야학을 한 동지들. 전남대 학생 출신자로서 들불 야학의 이론적 지도역을 맡았던 신영일 동지는 자신의 몸을 혹사한 끝에 87년, 동지들 곁으로 떠났고, 전남대 연극 운동 출신자로서 광주 민중 항쟁의 정신을 연극으로 체화시키고 보급하는 데 온 몸을 바쳤던 극단 토박이의 연출자 박효선 동지 역시 들불 야학의 조력자였는데, 그이 역시 지난 98년 지나친 과로로 인한 병사의 운명을 맞이하였다.
광천동의 어슥한 곳에서 노동자들을 만나며 청춘을 불살렀던 들불 멤버들의 이념적 지향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노동자계급을 조직하여 계급투쟁의 힘으로 사회주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동운동에 뛰어든 사회주의자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의 광주 시민들이 보편적으로 품고 있었던 김대중류의 민주정부를 세우기 위해 노동현장에 뛰어든 것은 결코 아니었다. 가난한 민중의 편에 서고자 하였고, 독재 정권과 타협없는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던 것이 들불의 정신적 내용물이었을 것이다.
특정의 시대 인간이 어떤 사상을 갖는가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존재하는 사회적 관계에 의해 주입되고 규정되는 측면이 훨씬 강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들불을 둘러싸고 있었던 들불 멤버들의 사회적 관계는 크게 보아 네가지 흐름이 있었던 것 같다. 일상적으로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영향을 주었던 하나의 흐름이 현대사회 연구소의 소장이었던 윤한봉 선배였고, 또 하나의 흐름이 녹두 서점을 경영하였던 김상윤 선배였다. 윤한봉 선배는 광주 전남 지역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민중 투쟁을 도우면서, 후배들에게 실천적 기둥이 되어 주었다면, 김상윤 선배는 그 특유의 예리한 논리적 사유의 힘을 가지고 후배들에게 여러가지 새로운 사상적 사조들을 소개해 준 이론적 기둥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아주 비밀리에 만남이 이루어졌던 두 흐름이 있었다. 한 흐름이 서울 청계 피복 노조에서 노동운동의 첫 발을 내디딘 이양현 선배, 그는 당시 호남 로켓트 전기 노동자들을 비밀리에 조직하면서, 박기순을 비롯한 후배들에게 노동운동의 침로를 잡아 주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흐름이 그 유명한 남민전이다. 남민전의 멤버였던 이강 선배가 들불 멤버들을 만나 무엇을 교양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이따금씩 신영일을 비롯한 들불 멤버의 입에서 무장봉기에 관한 담론이 불쑥 튀어 나왔던 것으로 보아, 어떤 형태로든 남민전 선배들의 혁명적 투쟁 기풍이 들불에게도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전혀 다른 어떤 힘에 의해 인생이라는 수레바퀴가 전혀 엉뚱한 곳으로 굴러가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를 깨닫고서는 놀라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들불 멤버들이 그 전형적인 사례일 것이다. 그들은 적어도 장기준비론적 방법론에 의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지향과는 달리 광주는 그들을 항쟁의 한 가운데로 불러내어, 청춘을 불사르게 만들었다. 그들은 조직된 노동자의 힘에 의해 역사를 개척하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의 전략을 비웃기나 하는 듯, 광주는 이 젊은이들을 불러내어 조직되지 않은 군중 투쟁 속으로 역사의 불꽃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평소 투쟁의 일선에서 공개적으로 운동을 지도하던 위의 윤한봉, 김상윤 진영이 계엄포고령의 확대와 동시에 피체되거나 수배되어 지하로 잠적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운동의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서는 평소 비공개적으로 운동을 하던 들불 멤버들이 나설 수밖에 없었지 않았겠는가? 들불 멤버들이 제작한 투사 회보가 거대한 항쟁의 파고 속에서 어떤 의미있는 역할을 담당했는지에 대해서는 후대의 사가들에게 남겨 두자. 윤상원 동지가 도청에서 얼마나 의미있는 항쟁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는지에 대해서도 후대의 사가들에게 남겨 두자.
나는 광주 민중 항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대해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별로 하고 싶지 않다. 내 가슴에 남아 있는 광주는, 그 날 광주의 들불이 되어 망월동에 묻힌 박기순, 윤상원, 김용진, 김영철, 그리고 신영일, 박효선 동지들의 따뜻한 가슴들이다. 늘 진지했고, 늘 소탈했던 우리들의 벗.
오늘 또 한 분의 벗이 우리 곁을 떠났다는 소식이 왔다. 김해교도소에서 나에게 박기순의 죽음을 알려주었던 노준현 동지가 간암과 폐암으로 젊음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가슴 속에 묻고갈 벗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생, 살자. 언젠가 망월동에서 벗들과 소주 댓병을 까고, 이태백을 읊으며, 신명의 춤, 출 날이 오지 않겠는가.